안영환의 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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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환의 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3

신발장수 0 2019.06.17

   신발에 목숨을 건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이다. 그 해 5월 나는 4개월 여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신발 본부가 있던 부산지사로 첫 출근을 하였다. 당시 SK의 신발 본부는 경쟁 종합상사들 중에서 사업 규모가 제일 큰 편이었다. 단순한 수출 중개나 대행이 아닌 바이어 개발, 상품개발, 생산공장 선정, 품질 관리 및 가격, 납기 관리 등 수출의 제반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었고 자회사로 제법 규모가 있는 신발 제조공장 3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규모가 큰 바이어는 주로 미국 쪽이었고 자체 공장들은 거의 미국 쪽 대형 바이어의 물량을 소화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속하게 된 구주 신발 팀은 소규모의 수입상이 주 거래처였고 소량 다품종 주문들을 중소규모 하청공장에서 생산, 수출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주팀과 비교해서 구주 신발 팀의 사정이 그리 편안한 것이 아니었고 그런 환경에서 실적을 내고 종합상사들 중 우위를 달리는 자부심이 매우 높았다.

 

신입인 나를 맡아 OJT를 담당한 P대리는 팀 내 최고 고참이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북유럽을 맡고 있었는데 실적도 좋고 똑 부러지는 성격에 목소리도 크고 할 말을 확실히 하는 스타일이라 신입사원이 느끼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출근 첫날, 50여 명의 구성원들과 상견례를 끝내기가 무섭게 P대리는 신발 냄새가 진동하는 구주 신발 팀 전용 쇼룸에서 OJT 교육을 시작했다.

 

밀폐된 쇼룸에서 처음 맡아보는 가죽, 고무, 화학약품의 뒤섞인 냄새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때 P대리는 짐짓 준엄함 목소리로 이제 막 받은 빳빳한 회사 다이어리를 펴게 하였고 첫 장 표지 이면에 자신이 부르는 대로 복창하며 크게 따라 적으라고 했다.

 

P대리는 나는, 신발에, 목숨을, 건다.”라고 또박또박 불렀다. 따라 받아쓰면서 속으로 이게 뭔가?’ 싶었다. 실소도 났지만 참으며 썼다.

 

나는 신발에 목숨을 건다

 

그런데 OJT 교육 중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수출 전쟁의 무용담과 처음 접하는 신발 제조공정과 신발에 대한 지식이며 공장관리 요령, 바이어를 사로잡는 협상의 기술 등을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P대리를 보면서 그가 정말 신발에 목숨을 건 상사맨으로 느껴졌다. 한편 부끄러웠고 내가 비겁해 보였다.

 

나는 신발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SK라는 종합상사의 울타리를 택한 것이었다. 신발이라는 아이템의 전문가, 수출 전사가 아니라 큰 종합상사를 뒷배경 삼은 그냥 그런 회사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합 상사맨으로 수출 첨병의 역할을 해보고자 SK라는 종합상사를 선택했고, 개인적인 인연과 경제적인 이유(당시 결혼을 약속한 지금의 아내가 있었는데, 부산에 있는 신발 본부로 지원하면 현지 생활을 위한 아파트 전세를 무상 지원한다는 최 팀장의 귀띔이 있었다)로 신발 본부를 지원했을 뿐 신발에 목숨을 건다.’ ‘신발의 전문가가 된다.’ ‘신발을 일생의 업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며칠간의 갇힌 OJT와 현장 교육을 통하면서 그저 소비자로 봐왔던 신발이 점점 흥미롭게 다가왔다. 막연히 알던 그 신발이 적어도 50개 이상의 원부자재가 모여 조립되어 만들어지고 갑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죽 처리 산업이나 섬유산업 등의 기반이 필요하고 아웃솔을 위해서는 철강산업을 기반으로 주물 등 철 가공기술, 그리고 고무 합성과 화학산업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정밀한 염색산업 등 기간산업 군이 총망라되어야 한다는데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유럽의 소규모 수입상인 바이어들도 냉장고를 수출할 때 알던 그들이 아니었다. 정육점에서나 쓰일 듯한 초대형 냉장고를 연간 수만 개를 수입하던 사우디의 아바르(ABBAR)1년에 한번 한국, 일본, 대만을 스치듯 지나면서 회사와 정부의 고위직과 식사하고 연간 수입 물량을 정하는 회의만 하고 돌아갔는데 신발 바이어들과는 상품의 개발, 가격, 수량, 납기, 공장 선정 등 모든 과정을 협의와 협상을 하여 진행하였다.

 

그만큼 그들에게 얼마나 더 필요한 정보와 가치를 제공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게 신발을 알아가면서 비로소 나도 신발 전문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다.

 

신발에 목숨을 건다던 P대리는 그 후 독일 지사를 끝으로 신발과는 이별을 하였고 늦은 나이에도 감정평가사 자격에 도전하여 활발하게 제 2의 목숨을 걸고 있다.


(사진은 당시 유행했던 브랜드별 신발 스타일)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선경(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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