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백화점’이라는 新문물 다섯 번째 이야기
대연각호텔에 자리했던 히라타 백화점 바로 옆에 있던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의 설립자 나카에 카츠지로(江勝治郎)는 1905년에 우리나라 대구에 미나카이 포목점을 개업했다. 이후 1911년 경성으로 진출, 경성점 본점이라고 했다.
나카에 카츠지로는 1924년 미국시찰을 통해 포목점 중심의 상점에서 백화점으로 변환을 결정하고 1933년과 1937년에 증개축을 거쳐 지상 6층의 건물을 르네상스풍의 화점 매장을 완성 했다. 현재 지하철 4호선 명동역 5, 6번 출구 밀리오레 빌딩이 해당 부지의 일부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 미나카이백화점에 대한 부분이다. 사실 당시 우리나라(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며 유통량을 자랑했던 곳이 미나카이 백화점이었다. 전성기였던 193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에만 12곳, 만주와 일본에 3곳의 백화점 지점을 운영했던 조선 최대 백화점이었다.
당연히 기반이 조선이었고 경성, 부산, 평양 등 대도시 중심의 다른 백화점과 달리 미나카이는 광주, 대전, 함흥, 흥남, 군산, 목포, 진주 등 지역의 중소도시에도 지점을 내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 거주자 및 조선 사람을 위한 제품공급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차별화를 통해 후발주자였지만 ‘조선과 대륙의 백화점 왕’이라는 칭호까지 붙을 정도였다.
미나카이의 경우는 교토의 본사, 경성 본점, 신경점은 모두 무선으로 연결되어 경쟁사들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합리적인 결정을 신속히 내릴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교토패션을 국내 소개했고 상품의 다양성 뿐 아니라 유행을 빠르게 조선땅에 전파시키는 역할도 수행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러한 미나카이 백화점이 브랜드력에서는 미츠코시에 뒤쳐졌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사와 기억에서 사라진 백화점이 됐다.
이런 미나카이 백화점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형제들(미나카이는 4형제가 함께 창업한 회사)이 동시에 사망하면서 1차적인 타겻이 있었고 후대들의 가업에 대한 승계의지 및 경영능력 부재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 백화점 부지는 해방 후 1946년에는 해안경비대 본부로, 그 후 대한민국 해군본부로 1958년까지 사용되다 1960년 4.19 학생혁명 후 참의원 국회의사당으로 쓰였고, 1970년 퇴계로 확장공사에 따라 건물은 철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현재 밀리오레 건물이 들어섰다.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당시 부산에 최초로 개점했던 미나카이 부산점 자리에는 현재 롯데백 광복점이 자리하고 있다.
미니카이 부산점은 당시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1937년 9월에 오픈했다. 700평에 5층 건물로 지어졌고 엘리베이터도 2대를 운행했다. 옥상에는 놀이시설인 목마, 요지경 등을 설치하였고 의류, 생활용품, 잡화, 완구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고가 조미료인 ‘아지노모토’와 유명 카라멜인 ‘모리나가’까지 판매하기도 했다.
백화점 100년 역사를 돌아본 안형준씨는 현대백화점에서 20여년간 일하며 틈틈이 일본과 한국의 백화점 역사 자료를 모아 이번 글을 썼다. 안형준씨의 글쓰기는 아직 진행중이며 연재가 끝날 즈음에 백화점의 현재와 미래가 더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