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덕현 에세이) 쿼터시대 우회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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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현 에세이) 쿼터시대 우회 수출

새 길을 내느라 수고한 이에게는 보상하라

 

1980년대 중반은 한국의 봉제 수출이 잘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리나라 봉제 수출을 자율규제라는 명목으로 제품별 쿼터 제도를 실행하여 매년 수출 실적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수량을 정하고, 그 수량을 다시 회사별로 정해주었다.

 

이러한 제도를 벗어나고자 80년대 중반부터는 국외 생산으로 우회수출을 시도하는 회사가 많이 늘었다. 과장으로 재직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대리가 영국 5항 오더를 받아왔다. 우리 회사에는 5항 쿼터가 없어 타 회사에 쿼터를 빌려 써야 해서 비용을 지급해야 했다. 그런데 비용이 너무 비싸게 나왔다.

 

 

우리 과원 모두 회의를 하며 해결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결과는 우리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공장을 세워 생산하여 우회 수출하기로 했다. 리비아에 봉제 공장을 세운 경험도 있었고, 또한 이미 타부서에서 국외에서 생산하여 우회 수출을 하고 있었다.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든 설비와 원부자재와 함께 기술자 일부를 선발 파견하였다. 당시에 파견된 직원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출장을 가서 만나게 되면 격려하고 같이 고생하곤 하였다. 한국에서 선적한 원부자재가 적도를 넘어가며 원단의 형태가 변질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러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차츰 안정되어 가며 유럽지역의 수출이 늘어 부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을 통해 우회 수출을 하는 기능이었지만 미래는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수출을 하는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판단으로 회사에서 주재원 파견을 고려하게 된다.

 

나도 자생력을 키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 사람이 적응하기에는 기후조건이나 생활 풍습이 너무 달랐다. 당시 대리직급에서 한 명을 주재원으로 파견했다. 나는 서울에서 주문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하여 우회 수출을 하는 방법으로 오래 갈 수 없으니 자체 자생력을 키워 인도네시아 현지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러 번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1989년 초에 오사카지점에서 근무하게 되어 자연 인도네시아는 잊어버렸다. 그 후 1991년 본사로 귀임하고 보니 인도네시아 공장 운영형태는 예전과 변함없이 그대로였으며 운영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것 또한 부서 이기주의가 국외공장 설립의 신정책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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