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환 에세이) 결정적인 그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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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환 에세이) 결정적인 그날 3

신발장수 0 2019.08.19

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20-3- 생선살 발라 먹듯

 

너무나 무기력했다. 바로 해임을 당할 수 있는 만큼 지분을 뺏기고 이사회의 구성도 역전이 되었다. 11시쯤 부랴부랴 달려와 준 A변호사로부터도 현실적인 법적 대항력이 없음을 확인한 후 모든 걸 내려놓아야 했다. 요구대로 사임하기로 했고 지분도 말도 안 되는 계산이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오늘 중에 송금까지 하겠다며 합의서, 계약서들을 만드느라 연신 부지런을 떨어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늦은 점심을 하러 갔지만 도통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하루에 5~6개비 피던 담배를 그날만 2갑 정도 피웠다. 수북이 꽁초가 쌓인 종이컵을 몇 번이나 치워야 했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있는데 N이 왔다. 2006년도에 미키 회장에게서 개인적으로 빌린 돈이 있었다. 그 동안 개인 돈으로 권리금을 냈었던 것이 10억원 이상이 되었고 계속 돈이 들어가던 상황이라 일본의 대주주인 미키 회장도 부담을 해달라는 취지로 약 20억원 정도를 요청했었고 일단 차용의 형식으로 돈을 받았다. 회수여부가 확실치 않은 권리금으로 사용될 것이라 변제의 의무가 없이 자금을 받는 것으로 하려 했으나 증여의 문제가 되어 당장 세금과 여러 이슈가 있었다. 할 수 없이 빌리는 형식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 운영자금을 좀 더 확보해야 해서 유상증자를 했는데 그때도 20억원 정도를 개인적으로 빌렸다. 그것은 당연히 갚아야 할 돈이었다. N은 이런 개인적인 차용금을 바로 변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환율이 거의 두 배가 되어 80억원쯤을 갚아야 했다. 20억원은 대부분 권리금으로 사용이 되어 현재 매장들이 운영되고 있다고 했으나 그런 것은 나중에 따로 청구를 하라고 했다.

 

 

엄격히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서류작업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나를 찾은 N이 더 황당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2006년 증자 때 빌린 20억원을 당시 증자했던 주식수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했다. 간단히 말하면 당시 주당 1,000원에 증자를 했는데 지금 8,700원이 되었으니 20억원을 8.7배를 곱한 170억 정도로 갚으라는 황당한 주장이었다. 거기다 디자인 오소의 그 동안 세전이익 전부와 대표이사의 총 급여를 회사에 반납하라고 했다. 부산의 H사장이 당했던 그대로였다. 계산도 이유도 없었다. 초법적인 것이었다.

 

또 여기에 더해 이 사임은 순수한 본인의 자유의사이고 회사와 관련한 어떠한 재산 및 정보를 모두 회사에 반납 또는 두고 나간다. 어떠한 경우도 회사의 직원과 일체의 연락, 접촉을 하지 않는다. 이를 위반하면 별도의 최고 절차 없이 금 100억원을 배상한다고 하는 확인서를 만들겠다고 했다.

 

내상을 입고 쓰러져있는 상대를 기어이 발로 밟아 죽이겠다는 심산인가. 일본 사람의 근성을 나타내는 말 중에 생선의 모든 살을 발라 먹는다는 것이 있는데 집요하게 상대의 상태를 봐가면서 조금씩조금씩 다 뺏어간다는 것을 빗댄 표현이다.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더 이상 이런 인간들과 얼굴을 맞대고 싶지도 않았다. A변호사는 일정이 있어 점심식사 후 돌아갔고 남아있던 주니어 변호사가 나지막이 얘기했다. “사장님, 저 사람들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화장실 가는 길에 보니 지금 신이 나서 희희낙락,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네요” 3~4년차 주니어 변호사가 보기에도 기가 막힌 상황이었나 보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차용금을 주식 수로 계산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고 향후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원금대로 돌려받겠다고 했다. 그 대신 디자인 오소는 기어이 반환받아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사임하자마자 금세 이유가 드러났다. 확인서는 문구를 수정해가면서 최종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후 3시쯤 사임서, 주식양도계약서, 디자인 오소 관련 확인서 등을 만들어서 가져왔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원하는 대로 사인을 다 해주었다. 비밀유지, 경업금지, 민형사상 문제 제기 금지 등 일본 측이 추가로 요구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들로 더 얘기하기도 싫었다.

 

311일은 특별히 기억나는 날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것이다. 3시가 조금 지난 시간부터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였다. 원전사고로 인해 일본의 모든 금융시스템이 셧다운 되어버렸다. 통신도 문제가 생겼다. 일본에서 송금 대기 중인 상태였는데 물리적으로 어려워졌고 다들 허둥지둥하는 것이었다. 사임서, 주식양도계약서, 디자인 오소 관련 확인서에는 사인을 한 상태였고 추가로 100억원 위약 운운하던 확인서는 문구 조정을 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중단이 되었다. 월요일인 14일에 다시 정리하자고 했다. 당황한 것은 일본 측이었다. 이미 외국인 투자 신고도 끝냈고 일본에서도 송금 신청을 해놨으니 기어이 오늘 끝내자는 것이었다. 원칙은 송금이 확인되어야 관련 계약서를 발행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때 내 심정은 빨리 이 자리에서 나가고 싶은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그들이 원하던 주식양도계약서, 오소 확인서들을 던져주고 나왔다. 사임서는 주식대금을 받아야 유효하다는 조건을 달아서 주었다. 월요일 아침에 송금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 채 완성되지 않은 100억원 위약 운운하는 확인서도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왔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악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듯한 홀가분한 마음이었을까?

 

직원 몇이 따라 나왔다. 길 건너 순댓국집에 앉았다.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보이는 직원들을 향해 내가 없더라도 회사 잘 키워라고 했다. 소식을 듣고 제주도에 있던 영업부장 L이 연락을 해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영업과장인 Y와 같이 있다고 했다. 전화를 돌려받으며 오히려 내가 다독였다. “주인의식 가지고 직원들 잘 이끌어서 회사 키우라

 

그렇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선경(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안영환 대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ounghwan.ahn.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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