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놀러오는 많은 지인들에게 “어디에 놀러가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한라산과 비취색 바다, 그리고 도민 맛집, 새로 생긴 카페 등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바다와 맛집 말고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 바로 오름!!
오름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산섬으로 유명한 제주이지만, 제주의 정중앙에 위치한 국내 최고 높이 1950미터 한라산과 함께 제주섬의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긴 크고 작은 지형이 368개나 있고, 이것을 오름이라고 일컫는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쌓다가 흘린 자투리 흙들이 오름이 되었다는 재미난 전설도 있는데, 사실 368개인지, 360개인지 자꾸만 깎이고, 다져지기에 몇 개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한라산 주변으로 흩어져있어 한라산의 새끼산들, 새끼봉우리 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 오름은 ~봉, ~ 악, ~산 등으로도 불린다.
내가 가본 오름을 꼽아본다.
우선 가장 큰 오름인 성산일출봉.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백약이오름
군산오름
붉은오름
사려니오름
물찻오름
자배오름
제지기오름
금오름
이승악...
열개가 겨우 넘는다.
이중 가장 자주 찾게 되는 오름은 붉은오름이다.
제주의 가장 인기 있는 숲길인 사려니오름 바로 옆에 위치한 이 오름은 멋진 풍경과 함께 시설관리가 잘 되어 있는 자연휴양림임에도 불구하고 사려니오름 만큼의 인기가 없어 참 의아하다. 찾는 이용객이 많지 않아 자주 이용하는 나로서는 한적한 휴양림의 숲 내음을 여유있게 한껏 맡을 수 있어 자연이 주는 혜택을 오롯이 느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오름은 등반에 가까운 체력과 강도를 준비해야하는 높은 곳도 있지만, 이렇게 붉은오름처럼 야트막한 낮은 산에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는 곳도 많이 있어, 등산을 만만하게 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도 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붉은오름을 내집 마당처럼 오고갔더니 용기가 절로 생겼다. 제주에 산지 8계절을 넘고 있는데 오름만 자주가고 백록담은 한번 보지를 못했다니, 말이 안 된다 싶어 무모하지만 지인들과 함께 겨울철 한라산 등반에 나선 것이다.
초보자에게는 왕복 9시간은 족히 넘을 거라는 겨울철의 한라산 등반은 마지막 대피소인 진달래대피소까지 12시에는 올라야 하고, 또 백록담 정상에서 1시30분 이전에 하산해야 겨우 해지기 전에 내려올 수 있다고 한다.
초보자에게도 괜찮을 법한 코스라고 알려진 성판악 코스를 선택한 우리. 나를 포함한 초보자 2명은 전문가 수준의 후발주자들보다 2시간이나 먼저인 7시대에 올랐으나, 12시경 진달래대피소에 후발주자와 거의 동시에 이르렀다. 한라산 등반이 첫 경험인 초보자에겐 대피소에서 먹는 컵라면과 달디단 간식 맛보다는 발밑 눈속에 파이는 아이젠의 불편함이 더 신경쓰여 먹는둥 마는둥하며 허겁지겁 바로 정상을 향했다. 평지에서 계단을 계속 오르는 지난한 4시간반을 뒤로 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한 나에게 정상까지의 한 시간은 정신없이 앞사람 뒷꽁무니만을 쫓아간 기억만이 남아 있다.
대피소 전의 등반과 달리 정상까지의 등반은 짧은 거리였지만, 가파른 등산로로 인해 초보자가 오르기에는 꽤나 부담이 되었다.
흐린 날씨 속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백록담을 향해 올라갔지만, 역시 구름과 안개 속에 숨어있는 백록담이 보이지가 않아 적잖이 실망하였다. 하지만 오르기에 지쳐 잠시 뒤를 돌아봤던 그때, 잠깐 구름 사이로 보인 멋진 제주시내와 바다의 풍경은 해발 1900미터의 상쾌한 공기와 함께 잊을 수 없는 풍경화로 내머리속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하산하면서 주변이 어둑어둑하여 시계를 보니 이미 6시.. 초보 등반가에게 한라산은 열시간이 넘는 시간을 요구했다. 이 정도면 초보자로서 양호하다고 애써 안위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갔다.
다음날부터 전신 근육통과 함께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사나흘 보냈나보다.
한번 올랐으니 이제 굳이 한라산 정상까지 안가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며칠 가지도 않아 등산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첫 번째 한라산 등반이 아쉬웠다.
오르기 전에는 함께하는 동반자와의 즐거운 등반의 설렘에, 오르면서는 이 고생길을 왜왔을까하는 후회에, 정상에 올라서는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쁨에, 오르지 못할 때에는 정상에 못 오르는 절망과 좌절감에, 내려오면서는 넘어질까봐 조바심에, 시간이 지난 뒤에는 지난 등반이 아쉬워 다시올라볼까 하는 기대감에... 산을 마주한 인간들의 다양한 심리는 그들의 삶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인생사의 한 궤적을 같이 도는 것 같아 참 신기하다.
사람들이 산을 다시 오르고 싶어하는 이유는 마음에 안드는, 또는 잘못 살아온 지난 인생의 발자국을 다시 새롭게 꾹꾹 새겨보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닐까?
한라산에서 내려와 난 아직도 한참은 멀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라산은 무슨... 그 많은 오름들도 제대로 못 올라간 주제에...
내 가까이에 있는 낮은 오름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연습을 해보고, 마침내 인생의 절정과도 같은 한라산 꼭대기에 다시 올라 정상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
(사진은 제주도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