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부?, 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약간 당황해하며, 다그치듯 나를 채근하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집안을 책임져야 할 큰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듯했다.
‘프로스펙스’로 대변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신발기업 국제상사가 1985년 부도를 맞은 이후 부산 지역의 경기는 악화일로(惡化一路)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발산업을 사양산업의 대표 명사쯤으로 여기던 1988년 4월이었다.
시절이 이러했으니 아버지가 나에게 내뱉었던 저 말도 일리가 없진 않았다. 나름 서울에서 번듯하게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소수 정예만 뽑는다고 소문난 선경그룹(현재 SK그룹), 잘 나가는 종합상사에 떡하니 붙기까지 했으니 큰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연수 잘 받고 좋은 부서로 배치 받아 자리잡을 줄 알았던 자식이 하필 신발부를 지원해서 부산으로 내려오겠다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으로, 밥줄 끊길 염려 없이 안정적으로 근무하다 갑자기 치킨집을 하겠다며 뛰어든 아들을 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급작스러운 결정을 듣고 놀랐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뿐이다.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서 대학을 다녔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부산에서 신발 관련 업을 하던 사람들은 주위에 많았다. 우리 아버지 역시도 신발 끈(슈레이스)을 만드는 원사와 신발 갑피에 쓰이는 재봉사를 가공해서 납품하는 제조, 도매업에 종사했던 일명 족장이(신발업에 종사하는 직업군을 지칭하던 말)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업무 특성상 신발산업의 부침에 따라 잦은 흥망성쇠를 몸소 체험할 수밖에 없던 터였기 때문에 서울까지 힘들게 유학 보내놓은 자식이 신발을 하겠다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온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사실 나도 당시에는 신발업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오히려 SK에 입사하기 전 2년 가까이 근무했던 LG전자(당시 금성사) 때의 경력을 살려 전자수출부를 희망했었는데 뜻하지 않은 계기로 진로를 바꾼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역시 인생은 작은 선택이 훗날 큰 결과를 낳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피부로 깨닫게 된다. 내가 신발사업팀에 지원을 하게 된 계기는 연수 중에 알고 지냈던 인사부 박 대리의 작은 부탁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 있던 어느 날, 나는 박 대리의 전화를 받았다. “신발 사업부가 부산으로 본부를 옮기는 바람에 지원자가 없다. 다급해진 구주(유럽) 신발 팀장이 서울에 와서 신발사업팀에 관심이 있는 후보자가 있다면 사전에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데, 신발부를 안 가도 좋으니 일단 한번 만나만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고 평소 박 대리와는 친분도 있어서 그날 저녁 부산에서 올라온 신발팀장을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가볍게 나갔던 그 미팅에서 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막상 만난 그 신발팀장이 그만 내 가슴에 불을 질러버렸던 것이다. 그날로 나는 신발팀으로 지원하겠노라 결정을 내렸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이 결정은 지극히 나의 오해와 판단 착오로 인한 것이었다.
신발팀장을 만나기로 한 시청 앞 플라자호텔의 1층 커피숍은 마침 리뉴얼 공사 중이었다. 때문에 공사 중인 커피숍 앞과 로비는 누군가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선망하던 종합상사 수출팀장의 이미지를 그리며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막상 내 눈앞에 서 있던 사람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왜소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빨간 조끼를 입은 최 팀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최 팀장은 만나자마자 곧바로 나를 북창동의 어느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앉자마자 그분의 첫마디가 “술 한잔하지”였고, 맥주잔에 소주 반 병 쯤을 콸콸 부어주는 것이 아닌가! 연수 중 배운 상사맨의 매너 매뉴얼에 따라 얼른 잔을 비우고 소주를 청하니, “아니야, 나는 따로 마시는 게 있어, 너무 속을 버려놔서…”하면서 가방 속에서 시커먼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잔에 가득 붓고 건배를 제안했다. 나는 최 팀장의 그 모습에 요즘말로 심쿵했다. 내 선망의 대상이었던 상사맨의 모습에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사실 LG전자를 그만두고 종합상사인 SK로 이직한 이유 중 하나는 ‘너무 일이 하고 싶어서’였다. 1986년 LG전자에 입사하고 1년 반 정도 정말 열심히 일에 파묻혀 살았다. 그 만큼의 성과도 있었고, 인정도 받았고, 재미도 느꼈다. 그런데 1987년 한국 사회에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지며 ‘서울의 봄’으로 봇물처럼 민주화의 요구가 전국을 강타했다. 오랜 군부 독재에 대한 항거가 표출되었고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위한 욕구가 용암처럼 흘렀던 시기였다. 당시 분위기는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되었고 당연히 산업현장에서도 민주 투쟁의 대오가 만들어졌다.
당시 나는 냉장고 수출 실적에 신기록을 내가며 일하는 재미에 빠져있던 때였는데 냉장고 생산 공장이 파업으로 가동을 멈추는 상황이 발생되었고, 기약 없이 공장의 재가동 소식만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도 난 3개월 정도를 참고 기다리다가 퇴사를 결정하고 찾은 곳이 종합상사였다.
그런 때에 내 눈앞에 나타난 최 팀장의 모습은 마치 총성 없는 무역전쟁에서 몸을 아낌없이 던졌다가 내상을 입고 수척하고 야윈 모습으로 돌아온 이름 없는 베테랑이었다. 소주 보다 독한 검은색 액체를 마시며 무용담을 담담하게 펼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피어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술자리를 파하면서 지긋이 내 손을 잡고 “우리 같이 해보자”라고 하는 최 팀장의 제안을 뿌리칠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나는 그날 완전히 그에게 무장해제 당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었고, 부모님도 놀라실 결정을 전격적으로 하고 5월부터 부산의 신발사업부 구주 신발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게 신발부의 일원이 된 후 알게 된 나름 충격적인 사실은 최 팀장은 원래 술을 전혀 못 마신다는 것, 그리고 독하게 보인 검은 액체는 건강 보신용인 율무초 달인 액이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더 놀라웠던 사실 하나는 그분은 원래 종합상사 출신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 팀장의 주 업무는 해외시장 개척이나 해외 바이어를 상대하는 일보다는, 내부 관리 쪽의 일을 전담하다시피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내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온몸을 불살라 일하는 종합 상사맨’에 대한 로망이 최 팀장을 통해 투영되었던 건 사실이었고, 결과적으로 30년 동안 신발업에 종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한 가지 귀띔을 하자면 술 한잔 못 마시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최 팀장은 그 후 회사를 퇴사한 후 ‘박달재 막걸리’라는 주류 유통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신발업에 관심이 없던 나는 30년간 신발업계에 몸담고 있고, 술을 전혀 마시지 못했던 최 팀장은 주류업계에 몸담고 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 투성이 아닌가?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년 ㈜선경(현 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년 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