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환의 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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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환의 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4

신발장수 0 2019.06.25


천막 공장에서의 첫 여름나기

 

무역실무에 대해서는 경험이 충분했기에 신입 OJT는 그리 길지 않게 끝이 났다. 이후로는 하청공장을 순회하면서 현장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P대리 바이어의 주문을 진행할 공장들에서 각 생산 공정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현장 실습과도 같이 업무를 배워가는 것이었다.

 

소위 007가방에 견본과 각 자재의 Swatch Book, 작업지시서 등을 가득 담고 사상공단의 하청공장들을 휩쓸고 다닌 1988년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복개되지 않은 사상천변 도로에서 1km쯤 떨어진 다음 공장을 향해 땀투성이가 된 채 터벅터벅 걸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전지적 시점으로 생생하다.

 

 

북유럽은 특히 겨울이 길고 추워서 스노우 부츠와 같이 겨울 제품의 주문이 많았다. 당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돌아 유럽까지 가는 항행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아무리 늦어도 815일까지는 선적이 되어야 정상적인 납기를 맞출 수 있었다. BK이라는 신발 공장이 있었다. P대리가 일찌감치 Snow Jogger 오더를 해놨고 6월 중순쯤부터 생산 진도 관리를 맡게 되었다.

 

장마가 시작될 7월 초 즈음 만난 BK 공장의 사장에게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국제상사의 재봉과장 출신이라는 사장은 납기 지연을 걱정하는 나를 앉혀놓고 일사천리로 예정 공정을 설명하였는데, Upper 용 자재는 이번 주말까지 전량 입고되고 합포를 3일간 한 후 재단을 715일까지 하고 재봉은 5개 라인에서 하루 4,000족씩 일주일 작업으로 마무리하고, 아웃솔의 프레스 작업과 미드솔의 가공 작업, 그리고 두 개를 붙이는 접착작업도 720일 완료된다. 그리고 본 제조 작업은 하루 2,000족 생산으로 15일이 걸리므로 오히려 10일 이상의 여유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외에도 각종 사소한 부가 공정에 대해서도 일사천리 설명해가며 더 이상의 문제 제기를 못하게 하는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LG전자에서 제품의 생산 계획을 수립하려면 모든 관련 부서가 모여 며칠을 머리 맞대며 조정해왔었는데 이 신발공장 사장은 모든 현황을 자기 눈금 보듯 술술 설명하고 딱 부러지게 정리하는데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자재 입고부터 하염없이 지연되었다. 사장의 약속은 뻔한 공수표로 남발되고 말았다. 급기야 예정됐던 선적일을 훌쩍 넘긴 8월 말에야 실제 생산에 투입되었는데 그때도 가관인 것은 만약 납기 지연 때문에 AIR FREIGHT(항공 화물 수송)를 요구하면 아예 생산을 하지 않겠다는 협박성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용을 나누어 부담하기로 하고 생산하여 선적은 하였는데 한 달여 뒤 바이어로부터 심각한 클레임을 받게 되었다. 신발의 아웃솔이 모두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었다.

 

 

상황을 파악해보니 납기를 맞추려고 주야로 가동을 했는데 검사원이 있던 주간에는 공정을 지켜서 생산하고 야간에는 생산 공정을 반만 가동한 것이었다. 신발은 모양을 제대로 유지시키기 위해 열을 가하고 급속 냉각시키는(Chilling) 과정이 있어야 하고 LAST(신골)를 삽입한 상태로 최소 4시간 이상은 Cooling을 시켜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접착만 시키고 포장을 한 것이었다

    

제대로 확인하기 못한 데 자책했지만 이미 날아간 화살이었다. 가내수공업 수준을 겨우 벗어난 정도의 소위 천막 공장들이 난립하던 시절이었다. 스스로 생채기를 내면서 생명력을 단축해 나가는 암울한 한국 신발 산업의 현주소를 새삼 느낀, 첫 여름 나기의 기억이다.

 

80년대 말까지 신발은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 중 하나였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기업가정신이 퇴락하면서 급전직하하는 모습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1991년도에 약 40억불 수출을 최정점으로 신발은 더 이상 주력 수출품의 지위를 급속히 잃어버렸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선경(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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