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미루지 마라
아버지께서는 둘째 아들인 내가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하셨다. 형님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이때도 장사하시던 시장 친구분들과 동네 친구분들에게 거나하게 한턱을 내셨다.
아버지는 8대 독자여서 할아버지 형제분과 고모님 두 분을 제외하고는 가까운 친척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려서부터 보따리 장사로 장날에 읍내를 떠돌아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한평생 혼자서 보따리를 매고 돌아다니며 가장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혼자 외롭게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형님과 누님 두 분, 그리고 남동생 한명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쉬는 날에는 아버지 가게에서 장사를 도와드리곤 했다. 그 때 아버지가 손님과 대화하는 것을 되새겨 보면, 아버지는 오늘날 기업의 존재 의의를 찾는 ‘고객 만족’이라는 개념이 몸에 밴 분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가게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한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삶을 꾸리셨다.
구러던 아버지에게 청천병력 같은 일이 생겼다. 1971년 4월,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버지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는 ‘암’에 대해 누구도 알지 못했고, 병원에서도 암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술하고 나서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했다.
아버지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실 무렵에 처음으로 TV를 들여놓았다. TV는 동네 한두 집에만 있는 귀한 가전이었다. 온종일 집안에서 지내야 하는 아버지가 무료해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토요일에는 작은 누님과 내가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파주 집을 교대로 다녔다. 나는 TV를 볼 요량으로 자청해서 파주집에 가곤 했다. 아버지는 병색이 완연했지만, 갈 때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아버지는 간혹 TV를 보시다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보다 더 나이든 요즘도 가끔 아버지의 체온이 그립다.
아버지는 그해 추석 전날, 5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셨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년 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제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