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1991). 신촌의 어느 주점에서 신입사원이던 필자의 손에 선배가 건네준 시집이다. 소설은 대학시절 많이 읽어왔지만 시집은 어쩌면 그렇게 손에 대기가 마땅치 않았는지 유하의 시집이 처음으로 꼼꼼히 읽은 첫 시집이었다. 이후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기형도 ‘입속의 검은잎’ 등 여러 시집이 내 손에 들려져 있었고, 한동안 내 가방에는 시집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시와 음악, 그리고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좋아하던 그 선배는 내 삶을 바꾸는 여러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시인와 문학평론들을 추천해주어서 부족한 필자가 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글쓰기를 하게 된 시작이 있었던 거다.
최근 서점에서 우연히 2017년에 발간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00호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를 보게 되었다. 간만에 서점에 들러 명절기간 동안 읽어볼 책을 고르다가 휘익 하고 눈에 들어온, 오래 되었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문학과지성사 고유의 디자인이 담긴 표지를 보았다. 500호! ‘무려 500권을 꾸준하게 만들어 왔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꾸준함이 있으려면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런 멋진 전통과 유산(Heritage)을 만들어 낼 수 있다.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40년 넘게 지속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과 같이 우리 대한민국의 산업 중에 이렇게 계속 되어진 사례가 있을까?
필자가 일해 온 패션산업에도 제법 오래된 브랜드들이 있긴 하지만 일관된 태도로 소비자에게 상품을 공급해온 경우는 별로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이 존경하는 브랜드를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패션 리테일의 상업성이라는 것은 예술과는 다르게 소비자가 구입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만 특별해지면 소비자의 만족을 넘어 소비자에게 존경을 받는 영역이 만들어 지기도 한다. 명품 등 럭셔리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소재를 포함한 품질, 생산 방식에 대한 철학 등 존경 받는 브랜드들이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패션 산업 전반의 역사와 경쟁력을 감안할 때 존경 받는 브랜드가 희귀하다는 아쉬움이 크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따른다. 원인이 잘못되어 있었다면 결과가 좋게 나올 수가 없다. 상품을 만들어 낼 때 ‘소비자로부터 오랜 선택’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품의 경쟁적인 본질을 지속성에 두고 만들어낸다면 실제 오랜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려면 소비자의 만족도가 높아야만 한다. 만족도의 결과가 소비자의 삶에 가치를 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가장 가볍고 착용감이 좋은 티타늄 안경테, 기능과 견고함을 갖춘 여행용 캐리어, 흡한속건이 가능한 기능성 소재 등 상품 개발의 노력이 결과물로 나타난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00호를 엮으며 조연정님이 쓴 발문 ‘우리가 시를 불렀기 때문에’의 일부를 인용한다. ‘시가 우리를 직접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시가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만은 포기되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상품이 소비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다.
박병철 이사는 다양한 복종의 패션 브랜드 사업과 패션몰을 포함한 온오프라인, 국내외 유통에서 머천다이징, 영업, 마케팅 및 전략기획 실행 경험을 통해 고객과 시장을 알고 있는 30년 경력의 비즈니스 디렉터다. 탁월한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패션 뿐 아니라 비즈니스 전반의 트렌드를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