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23화 - 털었는데 먼지는 안 나오고
2011년부터 시작되어 2015년에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지난한 소송전을 일일이 세세하게 설명하고 정리하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처음부터 터무니없고 황당한 주장들임에도 불구하고 1심부터 완전하게 무죄일 수밖에 없었던 재판을 3심까지 밀어붙이며 소모전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내막이 무엇이었는지 한참 지나서 생각해보면 몇 가지로 정리는 될 듯하다.
부산의 H사장이 당했듯이 회사를 빼앗아 놓고도 기어이 2라운드 운운하며 형사고발을 하자고 핏대를 세우던 그 때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타인의 회사를 위력으로 제압해 강탈한 후 도의적이던 법적이던 합리화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절차를 긍긍하던 그때의 데자뷰인 듯하다.
또 한편으로는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없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칙에 기대어 형사소송이라는 수단에 발을 묶어 놓고 탈탈 털어 궁극적으로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겠다는 지극히 1차원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그런 의도였음을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자신들의 부도덕함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내가 죄가 있어야 했고 일반적인 합리적 의심에 기대어 먼지 털이를 하고자 했다.
그랬다. 민사와 형사소송의 모든 과정에서 내가 상대하고 싸워야 했던 것은 일반적으로, 경험적으로 가지고 있던 합리적 의심이라는 편견이었다. 경찰, 검찰 그리고 재판부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의 변론을 맡고자 했던 변호인들 중에서도 처음에는 배임과 횡령이라는 포괄적 범죄의 범주에서 합리적 의심에 기초해서 판단하기도 하였다.
지인의 소개로 법리에 정통하다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를 만났다.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였고 그 변호사의 제안은 무죄가 아닌 벌금, 또는 집행유예에 대한 성공보수였다. 횡령과 배임에 대해 일부라도 유죄일거라는 오랜 경험칙에서 내용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판단을 한 것이었다. 경찰조사단계에서 의뢰하였던 검사장 출신의 경험 많은 변호사도 처음엔 그리하였다가 막상 조사를 지켜보더니 자신의 판단이 섣불렀음을 인정하였다. 퇴직금 지급 청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형사소송에서 컴퓨터 파손으로 전산장애발생 운운하는 것도 내가 컴맹임이 밝혀지는 순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4년여의 긴 시간과 3심까지 끌고 가면서 김앤장, 바른, 세종에 이르는 대형 법무법인을 투입한 상대방의 엄청난 물량공세에도 완벽하게 무죄로 끝이 난 재판의 과정과 내용은 뒤에 다시 정리하기로 하고 경찰수사와 검찰수사를 거쳐 황당하게 기소가 된 그 동안의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면 실소만 나올 뿐이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너무 컸다.
2011년 6월에 고소를 해서 그해 겨울쯤에 수서경찰서에서 몇 차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1년이 더 지난 2013년 1월쯤 서울 중앙지검에서 검찰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은 SK와 합자로 진행했던 상해 신발유통법인을 정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1년여 동안 매장을 5곳으로 늘려 사업모델을 검증하고 확산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검찰조사를 받는 동안 상대방의 고소 내용에 대응하여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소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출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나 법리적으로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에서 추가로 더 범죄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애초의 고소장에 적시된 혐의라는 것이 추론의 수준이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보완되면서 충분히 소명될 수 있었다. 4~5차례 10시간 이상의 집중조사를 다 마친 것은 2013년 2월 중순쯤이었고 담당검사는 결국 기소를 하지 못한 채 사건을 종결시키지도 않고 해외연수를 떠난다고 했다.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1년이 넘게 받았는데 최종 종결을 하지 않고 후임에게 넘기는 것이 좀 찝찝했지만 하고 있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검찰조사가 끝난 상황이라 3월부터는 아예 상해에 주재하면서 사업을 직접 챙기기로 하였다. 중국에서 신발멀티숍 사업을 하는 것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1선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직영매장을 확보해서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한 후에 2, 3선 도시로는 프랜차이즈 형태로 진행해서 빠르게 확산시키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의미있는 중심상권에 중대형의 직영매장을 확보, 운영해서 플래그쉽 기능을 하게 하고 △상품의 기획, 구매, 운영의 내부 역량을 극대화해서 내재화시키고 △System, 물류의 인프라를 수준 높게 구축해야 하는 전략적 process를 진행하고자 했다. 어렵사리 대부분의 브랜드와는 상품공급계약을 할 수 있었는데 매장확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해, 베이징, 심양, 청두 등 주요 지역을 조사하고 지역별로 부동산 중개회사와 협의를 하면서 매장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2013년 4월쯤에 SK의 CEO가 바뀌었다. 전임 CEO의 신규 사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증과 마일스톤을 정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신발 유통사업은 사업전략에 대해 인정을 받았고 계속 사업으로 분류가 되었다.
그해 상해의 여름은 유독 무더위가 빨리 찾아왔다. 7월이 되자 한낮의 기온이 40도가 넘었다. 7월 4일이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오후 3, 4시쯤 새로 입점한 매장을 둘러보러 막 나가려던 때 서울의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검찰이 기소를 했다는 것이었다. 1년여 동안 경찰, 검찰조사를 받게 하던 담당검사는 해외연수를 떠났고 후임 검사는 일면식도 없는데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었고 하다못해 간단히 불러 확인하는 절차도 없이 기소를 한 것이었다.
황당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2월까지 검찰조사를 한 이후 기소하기까지 상대방은 계속 변호사 의견서를 제출하고 있었고 거기에 기초해 검찰의 공소장이 작성되었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형사재판의 첫 준비기일에서 공소장을 일람한 판사가 ‘공소장이 법리적으로 맞지 않으니 기소를 취하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힐난하기까지 이르렀다.
공소장은 그 뒤 2번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문제는 중국에서 140억원을 투자해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었다. 형사재판은 민사와 달리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여야 하는 것이고 재판준비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중국에 머물면서 사업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그해 말 사업을 접고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를 믿고 같이 해준 SK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매장의 임대계약을 해지하게 되었고 많은 직원들을 퇴직시켰다. 상품들은 그 순간 재고가 되었고 모든 청산 절차를 마무리 하고 나니 140억원이 20억원이 되었다. 중국 사업의 성공 가능성도 날아가 버렸고 허탈한 경험만 남게 되었다. 판사가 보자마자 문제를 지적하며 취소를 권하던 어설픈 공소장이 어떠한 판단으로,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손실이 내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었다.
2심 재판이 한창이던 2014년도의 한가한 초가을 휴일이었다. 양재천을 따라 무심히 산책을 하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상대방도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는데 검찰 조사 때 담당했던 수사계장 A씨였다. 첫마디가 “잘 계시죠?”였다. 기소돼서 2심 재판 중이라고 하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기소가 될 수 없는 건데…”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A씨는 담당검사가 해외연수를 떠날 즈음에 인사이동으로 떠났으니 그 뒤 내막은 몰랐다는 것이었다. 새삼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년 ㈜선경(현 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년 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안영환 대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ounghwan.ahn.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