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17화 - 성장은 계속되고, 그런데...
2008년까지 정신없이 회사를 키워갔다. 명동, 강남에 대형 플래그십스토어가 버티고 있어서 기대대로 인지도는 빠르게 상승했고 전국의 대규모 상권에서 직영매장을 계속 확보하여 매출이 1,000억원에 가까워졌다. 지나서 보면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성장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07년 말에 직영 매장이 35군데까지 늘었지만 그 동안 중간에 문을 닫아야 했던 매장들도 거의 20군데 정도였다. 매장 후보지가 나오면 최소한 세 번 이상은 현장에서 확인을 하고 결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내 판단이 빗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아니다 싶으면 빠르게 문을 닫았다. 투자된 자금이 당연히 아까웠지만 기회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Scrap & Build의 과정을 겪다 보니 점점 오류가 줄어들긴 했다.
몇 가지 중요한 의사결정이 있었다. 2004년 부산의 무역회사를 직원들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법인을 만들게 해서 기존 회사의 모든 사업과 업무를 넘겼다. 부사장이던 H씨를 대표이사로 해서 50%의 지분을 가지게 했고 창업 멤버 5명에게 각 5%씩 그리고 내가 25%의 지분이 되도록 했다. 기존 회사는 매년 약 20억원 정도가 순이익으로 남는 회사였다.
내가 ABC-MART 코리아를 설립하고 서울에서 일을 하였으니 그 동안에는 H씨와 직원들이 실제 운영하고 있었다. ABC-MART에 모든 걸 걸고 배수의 진을 친다는 심정으로 결심했다. 그리고 10여 년간 공들여 만들어놓은 회사의 과실을 이제는 직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씨에게는 회사와 직원들을 이끌 리더십을 부탁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50%의 지분을 넘겨주었다.
H 부사장을 생각하다 보니 L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IMF 직후였던 것 같은데 부산 해운대에 사옥을 짓고 얼마 후 당시 학산무역이라는데 다니며 일본 담당을 한다는 젊은 친구가 인사를 해왔다. 나의 고등학교 4년 후배라고 했고 부산의 D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해서 일본어가 유창했다.
우리 회사에 입사를 하고 싶다고 지원을 했다. 그 당시 중국,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 정신없이 다닐 때라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입사를 하였고 일본어가 유창하여 일본 직원들과의 업무 소통에 금세 적응하였다. 그런데 H부사장이 입사를 하고 곧 나는 ABC-MART를 하느라 서울로 갔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둘 사이가 그리 원만치 않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명동에 매장을 오픈하느라 정신이 없던 2003년 4~5월경 L이 서울 사무실로 찾아와서 ABC-MART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아끼던 후배라 H부사장에게 양해를 부탁했더니 예상대로 흔쾌히 찬성을 했다.
ABC-MART코리아는 실제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지원받을 거리도 별로 없어서 일본어 전공을 살릴 업무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신발 제조, 수출업무와 그나마 관련이 있는 상품 MD를 담당하게 하고 기존의 K와 Y 등에게 업무를 배우게 했다. 부산에 있을 때 전세자금을 지원한 것에 좀 더 보태서 서울에서의 정착을 도왔다. 다행히 동갑이던 J와 S가 많이 도와주었고 잘 어울렸다. 특히 S는 2010년도 급여를 책정할 때 본인이 선임임에도 L이 상품과 영업을 맡아 일도 많고 직원들도 많으니 연봉이 자기보다 더 높아야 한다며 주장해서 1,000만 원 정도 차등을 두게 한 정도였다. 그랬던 S는 결국 2011년 내가 회사를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쫓겨났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리고 2004년도에는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 ERP를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기억하기로 2004년도의 연 매출이 약 220억원 정도였는데 ERP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비용이 약 20억원이었다. 우리 규모의 중소기업, 특히 제조업이 아닌 유통기업에서 ERP에 투자하는 것은 드물었지만 브랜드와 상품, 매출이 빠르게 다양화, 대규모화될 것임을 전제한다면 선제적으로 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이 맞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 때 만든 ERP 시스템은 내가 퇴사할 때까지 3차 고도화 작업을 거쳐 지금까지 회사의 통합 관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
2008년에 On-line 자사몰을 오픈할 수 있었다. 지금에야 모든 멀티숍들이 자체 On-line 몰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오랜 시간 브랜드들과 협상을 하여 얻은 결과였다. On-line 몰을 만들고 나서 고민을 했다. 차별화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상품, 그리고 가격정책, URL의 디자인 등이 떠올랐지만 경쟁사도 결국 마찬가지가 아닌가? 2008년도에 매장이 약 50개 정도였고 해마다 10개 이상씩 늘려가니 전국의 주요 거점을 거의 커버할 수 있는 정도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On-Off 연계 시스템이었다. On-line에서 구매한 상품의 교환, 반품이 Off-line 매장에서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Omni System이었다.
그렇게 회사는 커갔고 2008년에는 상장을 해도 될 정도가 되었다. 상장 주관사로 우리 투자금융을 선정했고 지정감사도 신청했다. 10월쯤 상장예비심사를 신청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9월에 뜻하지 않는 변수가 생겼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터져버렸다. 전 세계 금융시장이 한순간에 요동쳤고 우리나라는 IMF 이후에 또 한 번 금융대란이 발생했다. 1달러에 900원쯤 하던 환율이 두 배로 치솟았다. 일본 엔도 따라서 올랐고 100엔이 800원에서 1600원쯤 되어버렸다. 금융시장이 거의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 상장을 할 수는 없었고 일본 측과 협의해서 상장 절차를 미루기로 하였다.
그때까지 일본으로부터 회사의 운영자금으로 약 30억엔을 빌리고 있었고 원금으로 240억원쯤이었는데 환율 급등으로 차입금이 500억 정도가 되어버렸다. ABC-MART코리아를 하면서 굳이 비싼 한국의 이자를 내지 말고 필요한 자금은 일본에서 대여해주기로 하여 몇 차례 걸쳐 30억엔을 빌렸고 원금과 이자를 갚아가고 있었는데 환율문제로 남은 금액이 두 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금융위기 속에서도 공격적인 경영의 속도를 더 가속화했다. 남들이 주춤거릴 때 더 차별화해야겠다는 전략이었고 2008년 그해 매출이 드디어 1000억원이 되었고 영업이익이 175억원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위기를 기회로 삼아 승승장구하고 있던 2009년 여름의 문턱쯤에 미키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여금을 출자전환해서 지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뒤통수를 때리는, 1%도 생각해 보지 않은 요구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여금은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갚고 있고 현재의 경영상태로 상환에 전혀 문제가 없다. 일본에서 대여금을 주겠다고 해서 받았던 것이고 지금이라도 한국의 은행에서 대출을 해서 갚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동업을 하는 파트너에게 환율이 올랐다고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다. 무리한 얘기라고 느꼈던지 감사 쪽에서 그런 얘기가 있어서 전해본 거라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그날의 통화는 끝이 났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도 찝찝한 느낌이 있었지만 한번 가볍게 물어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09년이 지났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년 ㈜선경(현 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년 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안영환 대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ounghwan.ahn.94)
모두가 아는 앞ㅈ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