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13화 -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방글라데시와 미얀마를 새로운 생산기지 후보로 생각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특혜관세(GSP) 등으로 수입하는 ABC-MART가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수입관세도 없었고(당시 일본의 수입관세는 신발소재에 따라 달랐지만 가죽신발은 약 25% 였다.) 어떠한 신발도 수입쿼터를 적용 받지 않았다. 두 번째는 납기, 가격, 품질을 관리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기획샘플과 생산준비 등은 이미 자체 R&D 센터를 통해 충분히 검증되어 있었고 그 동안 해외공장관리를 통해 경험을 축적한 정예직원들이 있었다.
ABC-MART가 방글라데시나 미얀마로 옮겨줄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나도 힘들고 회사의 수익면에서도 나을 것이 없었지만 거래처에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잠재적 기회요소를 선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GSP 혜택이 있는 아세안 국가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 미얀마, 그리고 방글라데시. 그중에서 방글라데시와 미얀마를 선택했다. 영원무역과 방글라데시에서 신발제조를 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사회에 나와서 멘토처럼 존경하는 몇 분이 있었는데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이 그 중 한분이다. 방글라데시 제2도시인 치타공의 영원무역 공장 3층에 그분의 숙소가 있었다. 하얀 회벽의 방 한가운데 침대와 책상 하나만 달랑 있었다. 마치 구도자의 침실을 보는듯한 느낌. 세간의 평가는 여러 가지겠지만 방글라데시에서 여러 번 같이하며 느낀 것은 외길 기업인의 모습이었다.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공장은 설비나 시설 등 투자가 잘 되어 있었고 워낙 봉재에 특화된 회사다보니 생각보다 숙련도가 빨랐다. 원래 팜 트리(Palm tree) 밑에서 신발을 만들 수 없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만큼 더운 나라에서 신발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기계설비가 완벽해야 했는데 영원무역 공장은 최적의 파트너였다. 다만 하탈(Hartal : 동맹파업)과 같은 사회적 불안요소가 문제였고 너무 고온다습해 직원들이 무기력증에 빠질 수도 있었다.
방글라데시와는 달리 미얀마는 우스개로 말하자면 ‘맨땅에 헤딩’이었다. 처음 미얀마 수도인 양곤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색깔은 ‘WHITE, GREEN, GOLD’였다. 아시아의 부국이었던 나라가 정치적 문제로 오랫동안 정치 경제적 제재를 받다보니 모든 것이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잊혀진 나라였다. 그래도 과거 잘 살았던 기억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된 담벼락, 화단 등에 흰 페인트칠로 나름의 환경미화를 하는, 빈곤한 여유를 가지게 해서 방글라데시나 인도, 파키스탄 같은 주변 나라들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흰색으로 미화하다보니 열대의 녹음도 더 상쾌한 느낌을 주었고 불교국이다 보니 시내 곳곳에 솟아있는 황금색 파고다가 편안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했고 거기다 치안도 잘되어있어서 밤에 대문을 걸지 않을 만큼 매우 안전한 곳이었다. 대우그룹이 일찌감치 진출해서 대규모 봉재공장들을 운영하고 있었다.
생산위탁계약을 할 수 있는 신발 제조 공장은 전무한 상태여서 미얀마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거래하던, 워크부츠를 만들던 써니상사와 가죽구두를 만드는 에스콰이어, 두 회사를 설득하여 양곤 인근의 프랑따야라는 공단지역에 공장을 만들게 하였다. 일본이 수입하는데 쿼터가 필요했던 제품들이라 미얀마에서 생산하게 되면 쿼터가 필요 없게 되고 자연히 물량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나도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을 직접 만들어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제조공장인 써니상사와 에스콰이어는 지루한 인허가 과정을 거치고는 순조롭게 공장을 신축하였고 빠른 시간에 정상궤도에 진입하였다. 반면에 제조기반이 없던 터라 운동화 공장을 만드는 데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결국은 미얀마의 대형기업과 합작으로 진행하게 되었고 오더수주, R&D, 품질지도, 그리고 자재수급은 우리가 맡고 현지기업은 공장건설 및 인력을 담당하는 역할분담으로 시작을 하였다.
지금까지의 해외사업과는 다른 역할과 기능이 필요해짐에 따라 회사 내의 조직도 일부 변경이 필요했다. 즉 기존의 OEM 방식이 아니라 임가공 방식으로 바뀌게 되다보니 제품설계, 생산준비 그리고 모든 자재공급이 추가된 것이었다. 인원의 보강이 필요했고 새로운 부서도 신설되었다. 좀 더 전문적으로 업무를 총괄 관리할 부사장도 영입했다.
H씨는 SK의 선배였다. 꼼꼼하고 성실한 성품이었고 SK에서 임가공 수출의 경험도 많았다. 그 동안에 SK신발사업부는 팀으로 축소되어 있었고 성장동력이 고갈된 상태여서 다들 다른 길을 모색하는 분위기였고 결과적으로 그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사업이 정리되었다. 몇 차례 영입을 제안하였고 부사장으로 입사를 하였다. 그렇게 사업구조도 만들고 진용도 구축해서 본격적으로 미얀마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즈음이 2000년도쯤이었는데 어느 날 미키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년 ㈜선경(현 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년 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안영환 대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ounghwan.ahn.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