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사업본부 생산부장으로 부임할 당시에 거래하고 있는 협력업체가 100여개가 되었다. 그중 40여개 회사와만 제대로 된 거래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일년에 한두 번 코오롱과 거래한다는 명분 때문에 거래하고 있었다.
제품 품질 향상을 위하여 거래처 정리가 필요했다. 약 6개월 동안 협력업체가 검사한 보고서를 지표화하여 검사 결과를 매월 공표했다. 그러고 나서 검사 불량률이 높은 협력업체부터 정리하였다.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다 하니 어떤 거래처는 본부장 집에 칼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거래처는 협력업체 간담회 때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협박하기도 했다.
어느 한 거래처에는 3개월의 말미를 주고 품질이 향상되지 않으면 정리하기로 하고, 4개월의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품질을 향상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물러났다.
당시만해도 협력업체와의 접대 구습이 비일비재하였다. 휴가철과 명절 때 선물 주고받기, 접대 등이 있었으나 1994년 추석부터 ‘구습타파’를 내세워 모든 생산부 직원이 모범을 보이기로 합의하고 실행하기로 하였다. 직원들이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부서 내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브랜드 부서장이 생산부장인 나에게 찾아왔다. 생산부 직원의 검사 결과 불합격인데 협력업체의 각서를 받고 입고 판매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 제품이 잘 팔리면 문제가 없고, 팔리지 않으면 협력업첵 팔리지 않은 물건을 모두 인수하는 조건으로 검사 불합격품을 받았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검사 불합격품을 코오롱 매장에서 팔 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브랜드 부서장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불만이 자주 나왔다. 하지만 업무를 원칙적으로 처리하고, 이에 따라 생산부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바뀌니 부서 직원들의 업무 품질도 높아졌다.
생산부 직원들의 고생으로 코오롱의 개혁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한때 직원들의 오해도 있었지만, 직원들이 이해하고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었고, 나 또한 생산현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당시 같이 고생한 생산부 직원들은 지금도 분기별로 모여 소식을 주고 받는다. 현재는 모두 다른 회사의 임원이나 대표이사를 하고 있고 또한 자기 사업으로 성공한 직원도 있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년 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제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