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수출과 내수가 연계된 기업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의 봉제 수출은 내림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수 시장 역시 좋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백화점 직원들에 대한 비효율을 지적하며, 직원 감축을 요구했다. 회사 총원 약 3,000명 중 백화점 직원이 1,800여명, 사무실 직원이 1,200여명이었다. 매장마다 매출은 다른데 급여와 비용은 같으니 비효율 매장이 많았고, 이것이 회사에 부담이 되고 있었다.
당시 내 입사 선배 한 분은 퇴사하고 개인 사장으로 백화점 매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루는 선배가 나에게 찾아와 수수료를 3% 올려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매장에서 사장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는 나이가 많아서 판매는 못 하고, 매장 직원들 기타 업무를 도와주고 있어”
그래서 나는 “사장님이 그만두시면 되겠네. 매장 직원들 급여는 문제없고, 회사는 마진 안 올려도 되고”라고 하니 사장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영업과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한 매장에서 시범으로 테스트하기로 했다. 시범 매장의 성과가 좋으면 확대하기로 했다. (Shop-Master 제도)
당시 울산의 모 백화점 매출이 가장 좋았다. 직원은 5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후 나는 선임 사원(신모 양)을 만나서 자세히 설명하고서 회사에 퇴직하고 매장을 관리하는 방법을 권하였다.
신노 양은 너무 놀라며 “부장님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서에서 매출이 제일 좋은데 왜 나한테 퇴직을 하라는 것입니까?”라며 강하게 반발하면서 반대하였다. 몇 번을 이야기하고 설득하였으나 일주일 후 다시 협의하기로 하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일주일 후 서울에서 다시 미팅하였다. 자신을 제외한 4명의 직원은 코오롱 소속으로 하고, 1년간 자신의 급여를 보장해 주고, 일 년간 시행해보고 자신에게 손해라고 판단되면 다시 복직하는 조건으로 일단 합의했다.
신모 양은 참 열심히 했다. 왜냐하면, 열심히 해서 매출이 증가하면 급여보다 많은 돈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대성공이었다.
일 년 후 신양이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났다. 매장 직원들은 서로 하겠다며 모두 열심히 일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매장 직원들은 열심히 하면 돈을 벌 수 있었고, 회사는 매출이 증가하여 매장 직원들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제도였다. 바야흐로 코오롱의 첫 성과급 제도였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년 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제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