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덕현 에세이) 외국 현지사업은 공부부터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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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현 에세이) 외국 현지사업은 공부부터 하라

 

2005, 6년도에도 중국은 의류 브랜드 사업에 대한 브랜딩의 개념이 자리잡지 못했고, 재래시장에서의 생산과 단순 판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하이 법인에서 중국 백화점 영업을 하려면 중국인 인력을 양성해야 했다.

 

그래서 중국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을 1년에 7~8명을 선발하여 교육해서 2년 뒤에는 적어도 2~3명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갔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인에게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나 주인의식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신입사원 선발 면접 때의 에피소드이다.

입사 후 선배 직원이 거래처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을 본다면 본인은 어떠한 조치를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10명이면 10명 모두 그거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는 대답을 하였다.

 

또한 입사하고 1년 정도 교육을 받고 나서도 다른 회사에서 급여를 조금 더 준다고 하면 미련 없이 회사를 옮기는 것이었다. 직원이 회사 내 상품을 빼돌린다는 확고한 심증은 있지만, 현행범이 아닌 이상 잡아내기란 어려웠다. 영업하랴, 현지직원 양성하랴, 현지법인 시스템 짜랴, 초창기 국외 법인 현지사업팀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 어려운 것은 서울 본사와의 시각 차이였다. 서울 정책은 모든 것이 서울에 맞추어져 있어서 시장 보는 눈이나 사고가 서울 방식이었다. 상하이 현지 사정을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의 도움 없이는 사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의견을 절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이러면 나중에 성공해도 왜 성공했는지, 실패해도 왜 실패했는지 그 요인을 정확히 분석할 수 없어 재출발할 수가 없다.

 

당시 의류브랜드 사업 부문 업체 중 그래도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운영해나가는 회사는 오너가 직접 중국 사업을 하며 서울과 중국의 회사 시스템을 중국에 맞게 설계한 회사이다. 그런데 대기업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한두 회사가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고 대기업은 중국 현지사업을 안정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당시 본사는 닝보의 산산 그룹과 합작으로 숙녀복을 중국에 론칭하게 된다. 나는 반대하였으나 본사의 주도로 시작하여 1년이 지나고 나서 나도 합작회사의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중국의 사업개념과 한국의 사업개념이 서로 달라서 어려움도 있었으나, 이 사업 역시 본사의 준비 부족과 중국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며 흘러갔다.

 

상하이 법인에서의 경험과 그간의 중국 사업을 위한 서울 인력의 양성과 생산의 중국 시장 이전 등 신규 사업에 대한 준비로 아웃도어의 중국 진출이 이루어진다. 일부 준비와 중국 아웃도어 시장의 성장으로 그런대로 안착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5년 동안 어려움을 극복하며 당사의 3개 브랜드를 중국에 진출시키며 한국 패션의 중국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패션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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