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해서 우째 살라고 11화 - 안정적인 시장 진입 성공
사업은 희망과 기대, 그리고 불안감을 품은 채 시작되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가지고 있던 사업자금은 이리저리 정리해서 약 700만원. 지금 생각하면 이 돈으로 어떻게 시작했을까 싶지만 당시는 사업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깜깜한 동굴처럼 앞도 보이지 않았던 집안문제는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기적처럼 해결이 되었다. GT4000 시리즈에 이어 GT9000 시리즈까지 새로운 기획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1년 만에 순이익이 5억원이 넘었다. 돈이 생기면 매월 가장 먼저 코오롱의 채무를 갚았다. 코오롱에서 대리점권을 줄 테니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받게 되었다.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열심히 변제해준 성과를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었다.
기대한 대로 사업은 쾌속질주 그 자체였다. 기존 상품에다 신제품이 더해지며 월간 20~30만족씩을 넘게 수출을 하였다. 자연히 수익금이 늘게 됐고 이 때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개인사업자로 출발하였다. 회사명은 ‘삼영 M&D’. 1년을 하다 보니 회사의 수익금이 내 주머니로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다시 꺼내기가 힘든 일이었다. 개인사업자다 보니 소득세만 내고 나면 오롯이 내 몫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회사를 위한 재투자도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직원들과 나눌 수 있는 부분의 씀씀이가 움츠러지는 것을 느낄 때면 나의 이기적인 면을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년 만에 법인으로 변경하였다. ‘㈜삼영인터내셔날’. 나도 급여를 정해서 일정한 금액만 가져가고 직원들의 복리후생도 회사의 성장에 따라 체계적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잉여 이익은 적립하면서 회사가 재투자할 부분에 과감히 투자했다.
신발이 사양산업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반이 점점 약해져만 가는 현실을 하루하루 체감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매일매일 질문하였다.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 그것만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제일 먼저 회사의 절반에 해당하는 공간을 과감히 투자했다. R&D 공간이었다. 공장에 있던 R&D실(개발실)이 점점 제구실을 못하던 때였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하나 둘 다른 산업으로 이직하거나 중국 등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었다. 공장들도 경영합리화의 명분으로 새로운 설비, 시설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개발실의 기능을 축소하고 있었다. 사양산업의 전형적인 쇠락의 모습이었다.
재단, 봉재, 성형 기계들을 사 모았다. 개발실장을 비롯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하루에도 몇 가지의 새로운 기획 샘플을 만들 수 있는 체계를 만들게 되었다. 한 달에 몇 십 가지의 새로운 샘플들을 만들어서 ABC-MART에 보내고 품평을 하게 하였다. 공장은 새로운 오더를 위한 Confirm 샘플과 생산준비 작업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새로운 기획 샘플들이 늘어났고 자연히 오더도 늘게 되었다. 공장은 생산에만 집중하게 되어 납기도 빨라지게 되었다.
한 달에 두세 번 도쿄 출장을 갈 때마다 100여족씩의 샘플들을 핸드캐리했다. 나리타 공항에서 닛포리를 논스톱으로 가던 공항열차에 이민가방이라 불리던 대형가방 3~4개를 들고 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GT4000번 시리즈와 GT9000번 시리즈의 기본 상품들은 일정하게 판매가 되어 몇 년째 이어졌다. 그 위에 여러 가지 상품들이 새로 개발되어 추가되는 양상이었다.
그때 두 번째로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가를 낮추어 경쟁력을 더 높여서 안정적인 주문을 확보하자고 판단했고 기본 상품들이 있을 때 선제적으로 진행해야 연착륙할 수 있었다. 중국에 진출해있던 한국계 공장들을 살펴보았고 그중에 대련에 있던 P공장을 대상으로 결정했다.
ABC-MART는 조금 불안해했다.한국에서 안정적으로 공급을 잘 받고 있었고, 또한 당시 중국에서 대량으로 신발을 수입하는 사례가 별로 없었던 때였다. 어차피 자체 R&D 센터를 통해 새로운 기획을 계속하는 것도 변함이 없었고 일부 부자재를 중국 현지에서 조달하는 외에 주자재들은 거의 한국산을 사용하고 한국의 기술자들이 각 파트별로 현장지도를 하고 있어 품질 문제가 없을 거라는 확인을 해주고서 중국에서 생산을 진행하였다.
신설된 지 오래되지 않은 공장이다 보니 기계설비도 좋았고 제조 라인도 공간적인 여유가 있어 넉넉한 길이로 있었기에 품질 문제는 짧은 시간에 해결되었다. 한국의 기술자들과 우리 회사에서 파견된 품질관리 직원들이 모든 공정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점검하고 지도하면서 생산성도 빠르게 향상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오히려 ABC-MART 측에서 모든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만 생산을 의지하게 되면 리스크 관리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거꾸로 설득해야 할 상황이었다.
순조롭게 생산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P공장의 Y사장이 면담을 요청해왔다. 들어보니 생산을 아무리 해도 계속 적자가 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국에서도 검증된 제품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원인을 찾아보니 갑피를 만드는 가죽이 한국 생산 때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는 것이었다. 재단 공정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결국 온 공장을 샅샅이 뒤져 본 결과, P공장의 바로 인접한 곳에 가죽벨트를 만드는 공장이 새로 만들어져 있었고 P공장 자재 창고에 구멍을 내어 생산을 위해 쌓아놓은 가죽을 훔쳐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오는 해프닝이었지만 중국의 현실이었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안영환 대표이사는 30년 넘게 신발업계에 몸담은 신발전문 경영인이다. 1988년 ㈜선경(현 SK네트웍스) 신발사업부에 입사, 평사원을 거쳐 2002년 국내 신발멀티숍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에이비씨마트코리아를 창업했다. 2011년 3월까지 에이비씨마트코리아 대표이사를 지내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슈마커그룹(SMK T&I, JD스포츠코리아)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안영환 대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younghwan.ahn.94)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