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덕현 에세이) 첫 출발,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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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현 에세이) 첫 출발, 설렘

baiksong51 0 2020.01.27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가져라

 

1977710일 코오롱 빌딩으로 첫 출근을 한 날이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듣는 날인 것이다. 정식 출근하기 전에 약 2개월간의 간체 입직 교육을 받았지만,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당시는 정부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한창 추진하던 시절이라서 수출하는 기업은 전폭적으로 지원받던 때였다. 나는 이러한 흐름에 맞춰서 면담 때 수출 관련 부서를 희망하였다. 면담할 때 희망한 대로 수출관련 부서인 수출관리부에 발령이 났다. ‘수출관리부의 주 업무는 은행, 세관, 조합, 검사소 등 수출 관련 지원기관과의 업무였다.

 

 

수출관리부에서 행정지원 업무를 하면서 2년을 근무하고 난 뒤, 직접 수출을 담당하는 부서로 이동하였다. 나는 수출인의 멋style="letter-spacing: 0pt; font-family: 함초롬바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0pt;">10일 코오롱 빌딩으로 첫 출근을 한 날이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듣는 날인 것이다. 정식 출근하기 전에 약 2개월간의 간체 입직 교육을 받았지만,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른바 공공칠 가방을 들고 외국에 출장 가는 모습이나 스카이라운지 같은 사방이 뻥 뚫린 사무실에서 외국인과 오더를 협의하는 영화 같은 모습을 그리곤 했다.

 

상상 속의 나를 실현하고자 아침 일찍 일본어 학원에서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하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2년 동안 그렇게 하니 일본어로 어느 정도의 소통이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일본에 트레이닝의류(운동복)를 수출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자기 계발에 힘써야 한다. 서투른 것은 절대 잘못이 아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해야 한다.

 

당시 수출 담당자는 오더 수주에서 대금 회수까지 모든 업무를 단독 책임으로 수행해야 했다. 물론 과장과 수출 지원부서의 도움을 받았지만,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담당자의 몫이었다.

 

처음 일본 거래선과 상담을 하는데 입에서 영어와 일본어가 섞여나왔다. “쌩큐 고자이마스라는 웃지 못할 말실수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당시 일본 기업의 사장들 대부분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일어와 영어 또는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일본 거래선과 첫 상담을 하던 아슬아슬했던 기억이 난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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